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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Habits/Musicals

뮤지컬 킹키부츠 브로드웨이 관람 리뷰

이 글은 2014년 초에 브로드웨이에서 관람한 초연 공연을 리뷰한 글로서, 김해문화의 전당 매거진에 실린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세요,
뮤지컬 킹키 부츠 (Kinky Bo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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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뉴욕을 방문했다.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뉴욕. 고층 건물 사이로 부는 칼 바람은 아직도 여전하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그대로다. 바뀐 것이 있다면 타임스 스퀘어에 경쟁하듯 붙어있는 신작 뮤지컬의 대형 간판들뿐.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것들에 대해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일년 만에 들렀지만 롱런중인 공연들을 봐도 그런 감정이 든다. 몇 달 사이에도 극장 간판이 바뀌는 치열한 브로드웨이에서도 작년 한 해 자기 자리를 꾸준히 지킬 법한 굵직한 신작들이 탄생했다. 마틸다와 킹키 부츠가 바로 그것인데, 2013년 토니 어워드에서 마틸다는 12개 부문 노미네이트에 4개 부문에서 수상했고, 킹키 부츠는 13개 부문 노미네이트에 베스트 뮤지컬상을 포함한 6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브로드웨이는 결국 킹키 부츠에 더 많은 상을 안김으로써 명실공히 경쟁 우위를 선점하게 해주었다. 과연 그럴만한 작품인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 킹키 부츠를 관람하기로 했다.


킹키 부츠는 2005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영화 또한 영국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Trouble at to Top'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뮤지컬 프로듀서인 다릴 로스(Daryl Roth)가 2006년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에서 이 영화를 접한 뒤 영화가 주는 깊은 울림에 감동하여 뮤지컬을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이듬 해에 저작권을 획득하고 2008년에 '헤어 스프레이', '리걸리 블론드',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로맨틱하고 유머러스한 작품을 잘 만들어내기로 유명한 연출가 제리 미첼(Jerry Mitchell)을 일 순위로 캐스팅한다. 연출가 또한 이 작품과 사랑에 빠져 열정적으로 이 작품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 즈음 '라 카지 오 폴', '뉴시스' 등을 쓴 배우 겸 작가 하비 피어스타인(Harvey Fierstein)을 작가로 영입한다. 아마도 전작 '라카지' 집필 경험으로 인해 작품의 중심 인물인 드랙 퀸(Drag Queen - 여장 남자 쇼걸)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 후 클럽 음악을 잘 쓸 수 있는 작곡가를 찾다가 피어스타인의 친구이기도 한 신디 로퍼(Cyndi Lauper)가 작곡 및 작사가로 합류한다. 신디 로퍼는 뛰어난 싱어송 라이터로 그래미와 에미상에서 우승한 경험이 많은 왕년의 빅 스타였다. 창작진 결성 후 2년 동안 작품을 만들고 2012년 시카고에서 초연을 선보인 후 2013년 4월에 브로드웨이 정식 데뷔, 그 해 최고의 뮤지컬의 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이것이 뮤지컬 킹키 부츠가 걸어온 길이다.

 

빛나는 저 구두가 이 공연의 모티브! 

 


줄거리는 간단하다. 3대째 가업으로 내려오는 구두 공장의 아들 찰리 프라이스는 영국 시골에 있는 집을 떠나 사랑하는 약혼자 니콜라와 런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생각에 설레여 하고 있다. 그러던 도중 찰리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파산 직전의 구두 공장을 울며 겨자먹기로 경영하게 된다. 아버지의 유산이자 가업인 구두 공장을 살리기 위해 찰리는 도움을 주다 우연히 만나게 된 드래그 퀸인 롤라에게서 영감을 받아 튼튼하고 패셔너블한 킹키 부츠를 제작함으로 경영난을 타계하고자 하지만 고급 수제화를 만들어왔던 보수적인 공장 직원들의 반대 의견에 부딪친다. 그러나 킹키 부츠만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 찰리는 오랜 설득으로 롤라를 공장으로 불러들이고 밀란의 풋 웨어 쇼에 출전할 부츠를 디자인 해줄 것을 부탁한다. 대부분의 공장 직원은 이를 반기지 않고 특히나 돈은 여장 남자인 롤라에게 불만이 많아 누가 더 센가를 내보자며 권투 시합을 제안한다. 어렸을 때 좀 더 강한 남자로 자라기 원했던 아빠의 신념에 따라 권투를 배워야했던 롤라는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돈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일부러 져주고, 이를 알아챈 돈은 롤라를 찾아가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달라는 조언에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밀란 쇼 준비로 인해 예민해진 찰리는 자신의 결제없이 쇼 모델을 결정해버린 롤라에게 화가 나 그를 모욕하고, 직원들에게까지 까다롭게 군다. 모두 찰리를 떠나고 약혼자인 니콜라마저 떠나버린다. 깊은 상실감에 자책하고 있던 찰리를 찾아낸 건 그를 짝사랑하고 있던 여직원 로렌. 돈의 설득으로 직원들은 제자리에 돌아왔지만 깨어진 롤라와의 관계는 회복하지 못한 채 밀란으로 날아간 찰리. 모델 없이 홀로 높은 힐의 부츠를 신고 런 웨이에서 비틀비틀 워킹하던 찰리에게 구세주처럼 롤라와 엔젤들이 나타나 성공적으로 쇼를 마무리한다.

 

 


1막을 마치고 적은 메모를 보니 '뮤지컬이란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을 만큼 눈물 나게 재미 있어야 한다는 사람에게 추천할만한 공연'이라고 적혀있다. 그렇다. 킹키 부츠는 적어도 지금 내가 가진 일상의 문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신나고 흥겹다. 작품의 모든 포인트도 그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흥이 날 수 있도록 말이다. 사실 스토리는 두 남자 주인공의 성장과 성공을 다른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이야기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는냐가 늘 관건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넘치거나 오버하지 않으면서 각 파트간의 긴밀한 협력과 조화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 작품으로 토니상에서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롤라 역의 빌리 포터(Billy Porter)는 그야말로 물건이다. 전혀 여자답지 않게 생겼는데 사랑스럽다. 밋밋한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캐릭터. 롤라의 등장으로 극의 기운과 에너지가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남이 강요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살자고 외치는 그이기에 더 마음이 가는 캐릭터다. 소울풀한 보이스도 그의 매력을 더한다. 그가 부르는 두 곡의 발라드 곡 'Not my father's son'과 'Hold me in your heart'는 여장했을 때의 그의 모습과는 또 다르게 진지하고 고백적인 노래들이라서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또 주목해서 볼 캐릭터는 공장 여직원인 로렌이다. 사실 작은 배역일 수도 있는데 그녀가 부르는 'The history of wrong guys' 한 곡으로 관객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각인시킨다. 찰리에게 푹 빠진 마음을 독백처럼 노래하는 유머러스한 곡인데 혀가 풀린 듯한 억양과 반쯤은 정신 나가 보이는 제스처가 코믹 요소를 더한다. 관객들의 웃음 소리가 제일 컸던 장면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찰리는 무난하고 평범한 캐릭터다.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범생 캐릭터랄까, 초연 때 찰리 역의 스탁 샌즈(Stark Sands)는 이제 더 이상 공연하지 않지만 교체된 배우도 깔끔하게 잘 해내었다. OST 안의 작가의 글에 이 작품엔 앙상블이 없고 모두가 캐릭터가 있어 악보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공장 직원이건 롤라와 함께 일하는 엔젤들이건 모두 등장 인물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었다.

 

좋은 캐릭터를 만나 큰 상을 수상한 빌리 포터, 물론 잘해내었다!

 


음악 장르는 그리 다양하지는 않았다. 발라드 아니면 클럽 음악의 구분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생 각하는 뮤지컬 음악 같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팝 음악을 해온 신디 로퍼의 색깔이기도 했었을 것이다. 듣기 쉽고 반복이 많아 중얼거리게 되는 멜로디도 제법 있었다. 특히 'Sex is in the heel'에서는 클럽에 와있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음향도 입체적이고 사운드와 리듬이, 또 쿵쾅쿵쾅 울려대는 베이스의 고정박도 클럽에서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 외에 전 출연진이 함께 부르는 'Everybody say yeah'와 'Raise you up' 넘버도 꽤나 신나고 흥겨웠다. 기능과 분위기에 충실한 음악을 만들어서였을까. 신디 로퍼는 이 작품을 통해 토니상 최초로 작곡 부문 여성 단독 수상자가 된다. 다른 장르에서도 인정을 받은 그녀의 올 해 나이는 61세. 이렇게도 젊은 음악이 탄생할 수 있다니 새삼 놀랍기도 하지만 나이와 상관 없이 폭넓게 활동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의 융통성이 부럽기도 하다. 안무도 깔끔하게 떨어졌다. 다른 작품에 비해 유달리 프러덕션 넘버(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이 총출동하는 화려하고 대규모의 넘버)가 많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공간을 넓고 조화롭게 쓰는 안무 덕분일 것이다. 연출자가 안무를 동시에 맡았기 때문에 동선과의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어렵지 않고 추상적이지 않은 안무를 구사함으로서 친근하게 느껴졌고 'Raise you up'에서는 가사에 맞춰 율동 수준의 안무를 보임으로써 관객 중 몇 명은 함께 따라하기도 했다. 무대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기능적이면서 심플한 형태를 보여주었다. 무대 양 옆 공장 벽을 세워 배우들의 등 퇴장 용으로 사용하고 무대 중앙엔 빌리엘리엇에서 본 것 같은 2층짜리 유닛이 사무실, 침실, 클럽의 드랙 퀸 무대, 화장실, 복싱 경기장 등 여러 공간으로 분하여 사용되었다. 특히 유닛이 둘로 나뉘면서 복싱 경기장의 양 사이드가 되고 엔젤 그룹의 남자 배우가 누워 발로 링의 코너를 만들어 겉과 밖을 표현한 아이디어가 좋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렇게 젊은 음악을 쓸 수 있다니! 

 


관객들은 배꼽 잡고 웃고 박수치고 환호하는 등, 그야말로 공연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난 스토리가 탄탄한 북 뮤지컬을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 작품에 후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었던 건 관객들의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뮤지컬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안다. 관객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 똑같이 행복해지는 그 마음을. 이런 작품을 보면 뮤지컬이 꼭 이래야 한다는 모든 공식을 벗어나도 상관 없는 것 같다. 그 어떤 것도 뮤지컬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쉽게 지나칠 수 있었던 소재를 뮤지컬화 하기로 한 프로듀서의 안목과 몇 년을 걸쳐 준비한 제작진의 치밀한 사전 작업, 각 디자이너들간의 조화로운 협력 작업, 그리고 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할 뿐 아니라 주 8회 공연을 해낼 수 있는 지구력 좋은 배우들, 그리고 즐겁게 관람하고 엄지 손가락 치켜 올리며 화답하는 관객들. 이것이 진정한 뮤지컬 비즈니스 아닐까.


youtu.be/U5fbrXECAM8

 
현재 한국에서도 공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