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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ife/글쓰기 프로젝트

#05. 향수병을 달래주었던 그 시절 그 물건

결혼 후 유학 중이던 남편을 따라 약 6년간 미국에 거주했었다. 한 3개월은 좋았다. 치열했던 공연계 생활에 약간은 지쳐있던 터라 미국에서의 삶이 여유롭고 편안했다. 그러나 나의 성향이 워낙 아웃고잉 스타일이었는지 몰라도, 운전 면허 없이 남편 수업이 마칠 때까지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삶이 우울감을 가져다 주었다. 괜시리 우는 날이 많아지고 한국의 공연 소식을 듣거나 교회 공동체 사진이 올라오면 울적해져서 남편 앞에서 눈물을 쏟아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향수병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공부하고 집에 오면 날 살피기 바빴다. 맛있는 음식을 해주었고, 근처 바닷가에 데려다주었고, 바람이라도 쐬게 쇼핑몰에 데려다주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마이클스!
이 곳은 문구 덕후인 나에게 천국이었다. 각종 스크랩북킹, 종이 공예, 미술용품, 베이킹 용품 등등 다양한 공예 관련 재료들이 모아져 있는 종합 수공예 전문 샵이었다.



처음 간 날 무려 1시간을 넘게 있었다. 그 이후로는 참새 방앗간처럼 쇼핑몰에 들리는 날이면 의례적으로 들렸다. 무얼 사질 않고 구경만 해도 묶여있던 정서가 풀리는 것이다. (남편이 내 생일날 마이클스 기프트 카드를 매번 선물해줬으니 말 다했지..ㅋ)

그 곳에서 제일 좋아했던 파트는 단연 스탬프와 모양 펀치였다. 그 때부터 나는 세일로 싸게 나온 스탬프와 모양 펀치를 모으기 시작했다. 예쁜 종이들도.



핀터레스트에 올라온 예쁜 핸드메이드 카드를 보고 따라 만들면서 우울감을 내 몰았다. 실제로 손을 움직여 무언가에 집중하면 잡 생각이 확 사라지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였을까, 지금도 괜찮은 스탬프나 모양 펀치를 보면 그냥 집어든다. 예전만큼 쓰는 것도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첫 결혼 기념일에 남편에게 만들어준 첫 핸드메이드 카드



이제는 한 짐이 되는 그 보물 상자들은 여전히 나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듯 정리함 한 켠에 고이 모셔져 있다. 왜 내가 그렇게나 스탬프와 모양 펀치에 푹 빠져있었나 생각해본 적이 있다.

스탬프와 펀치는 보이는 그대로 결과가 나온다. 사과 모양의 스탬프는 샘플에 보여지는 그대로 찍혀지고, 별 모양의 펀치는 종이 위에서 별 모양 그대로를 생산해낸다. 벗어남이 없다. 딱 예상하는 그대로 나온다.

어쩌면 유학생활이라는 애매모호하고 불안정하며 예측 불가능한 그 시기에 난 무엇보다 확실하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그 삶을 원했던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을 위로 받고자 한 치의 벗어남이 없는, 내가 원하는 의도가 그대로 반영되는 그 조그만 것에 의지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세상을 살다보니 선한 의도가 늘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라는 걸 배워가는 것 같다. 내 맘과 당신의 맘이 다르며, 나와 상대방의 상식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알아간다. 그래서 어쩌면 난 순수한 마음 그대로 겉과 속이 똑같은 스탬프와 펀치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